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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화로와 물 끓이는 주전자

차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는 일이 아니다. 향을 마시고, 시간을 마시고, 그 순간의 분위기를 함께 음미하는 일이다.

그런데 녹차를 우리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말을 듣는다.

"녹차는 80℃ 정도의 물로 우려야 가장 맛있다."

왜 하필 80℃일까? 다만 80℃는 모든 녹차에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찻잎의 품종과 채엽 시기, 잎의 크기, 가공 상태와 원하는 맛에 따라 알맞은 온도는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80℃ 전후는 녹차를 부드럽게 즐기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이해하면 좋다.

오늘은 그 이유를 차를 마셔온 경험과 알려진 과학적 근거로 함께 살펴보려 한다.

끓는 물로 우렸던 첫 녹차

처음 차를 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물의 온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물만 끓으면 그대로 찻잎에 부었다.

하지만 첫 모금은 기대와 달랐다. 혀끝이 얼얼할 만큼 떫었고, 풋내와 삶은 나물 같은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는 차를 '우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삶고' 있었던 것이다.

녹차는 발효하지 않은 차다. 그만큼 향과 맛이 섬세하다. 조금만 온도가 높아도 본래의 균형이 쉽게 무너진다.

오랫동안 여러 온도로 차를 우려 보면서, 그리고 다도 선배들의 조언을 되새기면서 자연스럽게 도달한 결론이 바로 80℃ 전후였다.

① 감칠맛을 가장 잘 끌어내는 온도

녹차를 마실 때 가장 먼저 느끼는 매력은 은은한 감칠맛이다.

이 감칠맛의 중심에는 테아닌(Theanine) 이라는 아미노산이 있다.

테아닌을 비롯한 아미노산은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도 우러난다. 반면 물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카테킨과 카페인의 추출도 빨라져 감칠맛이 상대적으로 묻힐 수 있다.

그래서 80℃ 안팎에서는 녹차 특유의 부드럽고 달콤한 여운을 가장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② 떫은맛과 쓴맛을 조절하는 균형점

녹차의 떫은맛은 주로 카테킨, 쓴맛은 카페인의 영향을 받는다.

이 성분들은 수온이 높아질수록 더 빠르게 우러난다.

100℃에 가까운 끓는 물을 사용하면 떫고 쓴맛이 짧은 시간 안에 강하게 우러나 감칠맛을 덮어 버리기 쉽다.

반대로 80℃ 정도에서는 감칠맛과 떫은맛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한층 부드럽고 편안한 맛을 만들어 준다.

많은 사람들이 "80℃가 가장 맛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③ 향을 가장 아름답게 피워내는 온도

차를 우리면 가장 먼저 향이 잔 밖으로 피어난다.

찻잎 속에는 수백 가지의 향기 성분이 들어 있으며, 각각 잘 드러나는 온도가 조금씩 다르다.

온도가 너무 낮으면 향이 충분히 살아나지 않고, 반대로 너무 높으면 섬세한 향이 빠르게 날아가거나 거친 향으로 느껴질 수 있다.

80℃ 안팎은 녹차 특유의 풀향, 콩향, 밤향 같은 향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온도다.

그래서 한 모금 마시기 전부터 향으로 먼저 차의 계절을 느끼게 된다.

④ 맑은 빛깔까지 살려 준다

녹차의 맑은 연두빛도 적절한 수온에서 더욱 아름답게 드러난다.

너무 뜨거운 물을 사용하면 엽록소가 빠르게 변하면서 탕색이 탁해지고 갈색이나 올리브색에 가까워질 수 있다.

반면 80℃ 정도에서는 연한 황록색의 맑은 탕색이 살아난다.

눈으로 먼저 봄을 느끼고, 향으로 계절을 맡고, 마지막으로 맛을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꽃 그리고 갓 우린 차를 찻잔에 따르는 모습

기다림이 만드는 한 잔

물이 끓은 뒤 80℃까지 천천히 식기를 기다리는 몇 분.

그 짧은 시간만큼은 세상도 함께 느려지는 듯하다.

그리고 찻잎이 물속에서 서서히 펼쳐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차를 우리는 일은 단순히 음료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기다림을 즐기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녹차에 80℃가 좋은 이유는 단지 과학 때문만은 아니다.

향과 맛, 빛깔, 그리고 기다림까지 가장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온도이기 때문이다.

오늘 차를 우리실 때는 물이 조금 식기를 기다려 보시기 바란다.

그 몇 분의 기다림이 한 잔의 녹차를 전혀 다른 차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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